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유럽 혁명 (문단 편집) ===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omanian_Revolution_1989_Demonstrators.jpg|width=100%]]}}}|| || {{{#000,#fff [[부쿠레슈티]], 1989년 12월}}} || 이러한 상황 가운데 동구권에서는 당시 [[알바니아]]와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루마니아]]의 상황이 제일 심각했다. 특히 동구권에서 연달아 공산정권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유혈사태]]가 일어난 국가는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루마니아]] 뿐이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문서에서 '종말' 문단을 참조. 외채에 시달리던 타 동구권 국가들과 다르게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루마니아]]는 '''외채를 전부 갚았다.''' 그러나 이는 '''수입은 일체 안 하고 수출만 밀어붙이던''' 괴악한 경제 계획의 산물로[* 다만 이건 비단 루마니아만의 일은 아니고 상당수 중남미 국가들이나 [[이집트]] 등의 [[제3세계]] 국가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이로 인해 인민들의 생활 수준은 동구권에서도 알바니아에 뒤이은 최악으로 떨어졌다.[* 루마니아 하면 동유럽의 후진국이라는 평가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통제 정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소소한 시위도 유혈 진압하여 국민들의 저항을 원천 차단하였기 때문에 1989년 중순까지만 해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루마니아]]는 끄떡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한 달이 지난 [[12월 16일]] 헝가리계가 많이 살고 있던 [[트란실바니아]]의 도시 [[티미쇼아라]](Timișoara)에서 공산당 정부를 비판하던 [[개신교]] 소속 퇴케시 라슬로(Tőkés László, 1952~) 목사가 정부의 강압에 의해 교구에서 사임하고 지역 주민들이 여기에 항의하자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대규모 사상자를 낸 소위 티미쇼아라 사건이 터진 후 본격적으로 루마니아에도 저항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12월 21일]] [[이란]]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차우셰스쿠가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 관제 집회를 열었지만 이것이 시민들의 분노로 인해 역효과를 내고 마침내 다음날인 [[12월 22일]] 루마니아에서도 본격적으로 반차우셰스쿠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의 잔인한 독재를 싫어하던 군인들도 정권의 수혜를 입던 보안군 '[[세쿠리타테]](Securitate)'를 제외하고 시민들 편에 서서 시민들을 도와주게 되었으며 이는 유혈 사태로 이어졌다.[* 혁명 당시 국민들은 루마니아 국기 가운데에 그려져 있던 공산당 문장을 도려내어 이를 혁명군 깃발로 쓰면서 무력 저항을 했는데 이는 혁명의 목적이 차우셰스쿠 일족과 공산당 타도임을 알리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이러한 행위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이라는 선례가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A3%A8%EB%A7%88%EB%8B%88%EC%95%84%EC%9D%98_%EA%B5%AD%EA%B8%B0#/media/File:Romania_flag_1989_revolution.svg|#]], [[https://en.wikipedia.org/wiki/Romanian_Revolution#/media/File:Romanian_Revolution_1989_1.jpg|시민들을 도와주는 군부 및 군인들]]] 이렇게 차우셰스쿠의 비밀 보안군과 무장군중, 정부군의 대결이 일나면서 루마니아의 정권 타도는 인명살상이 벌어지는 교전양상으로 치달았고 차우셰스쿠는 [[북한]]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북한이 아닌 다른 나라로 도망치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시민들에게 붙잡혀 체포당했다. 이어 그의 아내였던 [[엘레나 차우셰스쿠]]와 함께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처형됨과 동시에 보안군의 준동도 대부분 진압되었다. 이렇게 루마니아도 1989년의 마지막 주를 해피엔딩으로 장식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GDyNfhdciA|차우셰스쿠 처형 직후의 루마니아 모습을 보도하는 1990년 1월 5일 당시 MBC 뉴스 영상.]] 이 사건을 '''루마니아 혁명'''이라고 부르며 '''1989년 12월 25일 혁명 이후 루마니아인들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인 [[민주화]]를 쟁취했다.''' 그리고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 부부의 처형을 끝으로 [[사형]] 제도도 폐지했다. 하지만 민주화의 광명엔 저의가 있든 아니든 그 빛을 가리려는 암막이 있는 법. 루마니아 민주혁명은 단락의 초입에서 명기했듯 동유럽 [[도미노 이론|도미노 붕괴]]사상 유일한 유혈혁명이다. 급진주의에 경도된 유럽 사상계는 루마니아 민주화의 폭력성을 강조해 언뜻 사망자에 대한 온정주의적 접근 이면에 혁명을 격하, 폄훼하는 경향이 존재해 왔고 이는 21세기에도 이런 낙인을 일소하는 과제를 루마니아 학계에 안기고 있다. 이런 과제는 루마니아 혁명 30주년인 2019년에 재차 대두되어 조명된 바 있다.[* 실제로 혁명의 개념과 의미를 정의하는 조건엔 정치 기득권층의 주류와 비주류를 불문한 일소 및 이러한 일소행위로 대표되는 사회적 폭력, 그것의 성취수단으로서의 물리적 폭력이 필수대전제로 요구되기 때문에 혁명의 의미를 축소하는 데 있어 폭력성은 다소 설득력 있는 근거라고 보기에는 힘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